윤치술 교장산악인과의 대화

[윤치술 칼럼 <2>] “나마스떼, 밍구릉”

서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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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06 11:18

히말라야산맥의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Annapurna Bace Camp(4,130m) 트레킹을 하다 보면 로지Lodge마다 아주 특별한 안내판trail map board을 만나게 된다.

단순한 정보전달에 그치지 않는 독특함은 엉성한 지도와 잘 그린 개념도를 버무린 듯하다. 이 매력적인 그림에 빠져 한참 들여다보면 무지개 저편의 멋진 세상이 펼쳐져 있다. 긴 트레킹으로 인해 무거워진 발걸음은 이내 피로가 풀리고 앞으로 걸어가야 할 낯선 길들은 벗이 되고 그 길 위에서 만들어질 이야기들은 뭉게구름 같은 그리움이 되어 모락모락 피어난다.

궁금했다. 대체 누가 그렸을까? 분명 안나푸르나에 대한 사랑을 품고 수없이 오르내린 사람이리라. 겸재 정선도 금강산을 흠모하는 깊은 애정과 치열한 세밀함으로 걸작 ‘금강전도’를 만들어내지 않았는가? 이 그림은 마치 운보 김기창 화백의 ‘바보산수’를 닮은 듯 순수하고 꾸밈없다. 걸어야 할 길의 시간과 거리, 닿게 될 봉우리, 건너야 할 계곡, 히말라야의 주인인 꽃과 나무, 동물들을 가로 2m 세로 1m 남짓한 양철판에 과감한 생략이지만 모두 담아냈다. 더불어 사물을 강조하는 바가 너무도 뚜렷해 트레킹에 관한 모든 정보를 단박에 알아볼 수 있다. 파격적인 사물의 배치와 과장된 왜곡 등은 보는 이를 배시시 웃게 만들기도 하면서, 히말라야라는 중압감을 덜어주고 편안함과 해학이 넘치는 전혀 새로운 개념의 안내판인 것이다.

2012년 11월 데우랄리 로지에서 마차푸차레 봉우리를 바라보며 그림 그리는 데 몰두하고 있는 작은 키의 네팔리를 만났다.

“간드룩, 촘롱, 시누와 로지에 있는 그림의 화가가 맞습니까? 나는 안나푸르나를 찾을 때마다 그림을 만나는 기쁨에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그 그림을 이정표 삼아 그리움을 키워갈 수 있었고,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에게 많은 질문을 던졌고, 트레킹에 영감을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표했다.

그는 안나푸르나 산록마을 ‘킴롱’의 밍 프라사드 구릉Min Prasad Gurung(50)이었다. 양지바른 싸리울 밑의 민들레처럼 온화하고 바위처럼 말수 적은 화가는 닳고 해진 수첩을 내밀며 내 이름을 써 달라고 했다. “ABC를 다녀오면 이 그림은 완성되어 있을 것이고, 그대 이름을 기념으로 새겨 놓겠다”고 하면서.

최근 SNS를 통해 필자의 이름이 오르내린다. ABC 트레킹 중 데우랄리 로지에서 우리나라 사람 ‘윤치술’이 그린 그림을 보게 되어 반가웠다고 말이다. 그런데 그 그림은 내가 그린 것이 아님을 이 자리에서 밝힌다. ‘밍구릉’이란 화가가 천재적인 창조성으로 세상의 트레커Trekker들에게 즐거움과 행복의 꽃다발을 안겨주기 위해 그려 놓았다는 것도 함께 알려 드린다.

밍구릉의 그림을 추억할 때마다 궁금한 게 있다. 왜 한국인은 산을 그의 그림처럼 행복하고 여유 있게 즐기지 못하고 도전, 극복이라는 일그러진 틀에 가두면서 전투적으로 오르내릴까? 산은 생각과 행위에 따라 그 의미가 사뭇 달라진다. 설악산에서 공룡능선을 뛰어 내달리면 ‘산악마라톤’이고, 장군봉·천화대 등 바위만 골라 타면 ‘암벽등반’, 한겨울 토왕폭을 오른다면 ‘빙벽등반’, 수렴동계곡 맑은 물소리를 벗 삼아 걷는다면 ‘유산遊山’이고, 남설악 장수대에 텐트 치고 별을 헤며 푸른 달빛에 젖어 잠이 들면 ‘캠핑’이 되는 것이다.

초록이 푸르름을 향해 치닫는 아름다운 환희의 계절에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산을 만나야 할까? 그 답은 밍구릉의 행복한 그림에 담겨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그 답을 밍구릉의 그림처럼 길을 따라 자연과의 교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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