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곤 대장산악인과의 대화

[김미곤 14좌 완등| <4> 등반 역정] 2000년 초오유 이후 매년 원정 떠나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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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06 17:12

도로공사 근무 ‘직장인 14좌 완등’ 기록…
김홍빈 대장 돕고, 후배 이끄는 모범 보여

에베레스트 정상에 선 김미곤(오른쪽) 대장. 왼쪽은 김홍빈 대장.
에베레스트 정상에 선 김미곤(오른쪽) 대장. 왼쪽은 김홍빈 대장.

김미곤 대장(한국도로공사·블랙야크 익스트림팀, 45)이 지난 7월 9일 낭가파르바트 정상에 섰다. 이로써 김 대장은 국내에서 7번째, 세계에서 41번째로 8,000m급 14좌 완등에 성공했다. 그의 첫 8,000m급 등정이었던 2000년 초오유를 시작으로 18년 만에 14좌 완등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가 본격적으로 14좌 완등을 선언하고 등반을 시작한 것이 2008년부터이므로, 10년 만에 9개 8,000m 고봉을 오른 셈이다. 빠른 속도라고 보긴 어렵지만, 한국도로공사에서 근무(2002년부터 현재)하며 세운 기록이기에 ‘직장인 14좌 완등’이라는 특별한 타이틀을 추가했다.

그렇다고 직장을 다니며 취미로 등반을 한 건 아니다. 광주 서영대산악부 출신으로 젊을 적부터 45세인 지금까지 오직 산만 바라본 골수 산악인이다. 14좌 완등자인 한왕용·김창호 대장과 함께 등반을 해온 전문 고산등반가다.

그는 성실한 등반가다. 처음 고산등반에 나섰던 1998년부터 올해까지 한 해도 빠짐없이 고산등반을 했다. 아무리 산악인이라 해도 평생 한 번 나서기도 어려울 수 있는 고산등반을 20년 동안 매년 해왔다. 언변이 유창하거나 화려한 성향은 아니지만, 조용하고 우직하게 그리고 흔들림 없이 등반가의 길을 걸어왔다. 더불어 공기업에서 일하고 있기에 직장에 누가 되지 않게 조심스런 행보를 이어가면서도 매년 거침없는 도전을 해왔다.

앞서 언급했듯, 그는 2008년부터 14좌 완등을 선언하고 자신만의 목표를 향해 등반을 했다. 그 이전의 초오유, 마칼루, 가셔브룸Ⅱ봉, 에베레스트·로체 등정은 선배들이 주인공이었다. 운 좋게 정상에 서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조력자 역할을 했던 그가 산악계에서 주목을 받은 건 2007년 에베레스트와 로체를 연속 등정하면서였다.

에베레스트와 로체는 능선이 연결된 멀지 않은 위치에 있다. 하지만 하나의 8,000m급 산만 오르기도 벅찼기에, 한 번의 원정에서 두 개 산을 모두 오른 한국인은 없었다. 그와 윤중현이 한국인 최초로 에베레스트·로체 연속 등정을 이루면서 주목 받게 되었고, 자신만의 14좌 등반에 도전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1좌  2000년 초오유(8,188m)

그는 “시키는 대로만 했다”고 한다. 서영대산악부 OB인 나관주·김영학 직계 선배를 따라간 원정이었고, 막내였기에 선배들이 이끌어 주는 대로 3명이 함께 등정했다. 그가 속한 대학산악부는 엄격한 군대식 분위기였고, 그는 늘 선배보다 더 많이 짐을 메고 먼저 일어나 밥을 하는 등 기강이 바짝 들어 있었다.

고산 경험이 부족한 초짜인 그를 정상으로 이끄는 데 이보다 효율적인 방법은 없었다. 생명이 오가는 8,000m 고산에서 가장 안전한 방식이었던 것이다. 경험 없고 힘만 좋은 막내를 정상에 오르게 한 것이 대학산악부 기강이었다.

김미곤 대장은 1998~1999년의 해외원정에서 정상공격 기회조차 얻지 못한 적도 있었기에 “미곤아! 정상 가자!”는 말이 “너무 반가웠다”고 한다.

2좌  2001년 마칼루(8,485m)

한왕용 대장을 따라간 원정이었다. C1과 C2를 오가는 등 한참 등반이 이뤄지는 와중에 대원 한 명이 심한 고산증세가 왔고, 그에게 후송 임무가 떨어졌다. 고도를 약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카트만두까지 후송하는 임무를 맡았다. 남은 일정을 감안하면 등정 기회가 완전히 사라지는 셈이었다.

그러나 하산 캐러밴 도중 셰르파에게  후송을 맡기고 정상공격에 참여하라는 연락을 받고 다시 등반에 복귀했다. 천운이었는지 한왕용 대장과 함께 정상에 갈 만한 대원이 없어 그를 다시 부르게 되었다. 셰르파 2명과 함께 최종 캠프를 떠나 정상 공격을 시도했지만, 동행한 셰르파들은 어리고 경험이 부족해 번갈아 선등을 서야 했다. 9시간 만에 정상에 섰고, 산소를 사용하지 않았기에 약간의 고산증세가 있어 “졸렸다”는 것이 그가 정상에 섰을 때의 느낌이다.

3좌  2006년 가셔브룸Ⅱ봉(8,034 m)

광주의 선배 산악인 김홍빈 대장을 보좌해 등반에 나섰다. 김홍빈 대장은 1991년 데날리 등반 중 동상으로 열 손가락을 모두 잃은 장애산악인이다. 대원은 김홍빈 대장과 자신뿐이었다. 그가 모든 역할을 해야 했다. 로프 설치하고, 짐 나르고, 텐트 치고, 밥 차리고, 대장의 등반을 수족처럼 돕는 등 어려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히말라야에 간다는 자체가 좋았다”고 한다.

주변에서는 이들을 두고 “미친 녀석들끼리 미친 등반을 한다”고 얘기했을 정도였다. 강인한 체력의 정상인이라도 생명이 위험한 고산이었기에, 당시로서는 그런 시선이 당연한 것이었다. C4에서 10시간이 걸렸지만 결국 김홍빈 대장과 함께 정상에 섰다. 

로체 정상에 선 김미곤 대장. 한국 최초로 에베레스트와 로체를 동시 등정한 원정이었다.
로체 정상에 선 김미곤 대장. 한국 최초로 에베레스트와 로체를 동시 등정한 원정이었다.

4~5좌 2007년 에베레스트(8,8 48m)·로체(8,516m)

한국도로공사 원정대원으로 세계 최고봉 도전에 나섰다. 김홍빈·김창호도 함께했다. 그는 김홍빈의 등반을 돕는 역할을 맡았다. 컨디션이 좋았던 그는 강연룡, 윤중현 대원과 함께 로체를 등정했다.

열흘 뒤 에베레스트에 도전했다. 김홍빈 대장과 함께 최종 캠프를 나서 에베레스트 정상을 향해 출발했다. 그가 셰르파 한 명과 앞서 나가고 김홍빈이 뒤를 따랐다. 아침 7시40분 등정했으나 김홍빈 대장이 보이지 않았다. 셰르파를 내려 보내면서 “김홍빈 대장과 마주치면 기다릴 테니 빨리 올라오라고 전해 달라”고 얘기했다.

산소를 아끼기 위해 밸브를 잠그고 몇 시간을 기다린 끝에 김홍빈 대장과 윤중현 대원을 정상에서 만났다. 하산하기에 늦은 시간이었으나 다행히 사고 없이 무사히 내려올 수 있었다.

6좌 2009년 다울라기리(8,167m)

전북산악연맹의 다울라기리 원정에 참가했다. 악천후였으나 김홍빈, 고우석 대원과 함께 정상에 섰다. 사건은 하산길에 생겼다. 고우석 대원이 실종된 것. 하산 도중 쉬고 있던 고 대원은 좁은 길을 지나던 셰르파와 부딪혀 추락했으나, 구사일생으로 올라왔다. 그러나 시간을 너무 지체한 탓에 죽음의 비박을 감행해야 했다.

C3에 도착한 김홍빈과 김미곤은 고우석 대원이 먼저 C2까지 내려간 줄 알고 있었으나, 실종되었다는 무전을 받았다. 다음날 아침 그를 찾기 위해 정상 쪽으로 향하다가 하산하는 고우석과 상봉했다. 힘이 넘쳤던 김미곤은 귀국하지 않고 곧장 셰르파 한 명과 안나푸르나 등반에 나서 C2까지 진출했으나 등반시즌이 끝나감에 따라 낙석이 심해져 뒤돌아서야 했다.

전환점, 2010년 마나슬루 등반

잊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원정이었다. 도로공사팀과 경상·전라권 산악인들이 마나슬루를 올랐다. 윤치원, 강연룡, 김주형, 박행수, 김홍빈, 김미곤이 최종 캠프에서 정상 공격에 나섰으나 악천후로 돌아서야했다. 사고는 하산길에 생겼다. 1m 앞도 안 보이고 사람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지독한 눈보라가 이들의 발을 묶은 것이었다. 결국 죽음의 지대에서 목숨을 건 비박을 감행했다. 다음날 이들의 상태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알파인스타일로 빠르게 정상에 서기 위해 C4를 구축하지 않았고 고정로프 또한 깔지 않아 클라이밍다운으로 위험지대를 내려와야 했다. 김미곤은 추락하고 눈 속에서 구르길 반복하는 등 구사일생 C3에 닿았다. 쓰러져 잠들었다가 운 좋게 정신을 차려 겨우 텐트에 들어왔다. 결국 윤치원은 실종되고 박행수는 플라토 지역에서 숨이 멎은 채 발견되었다.

고인이 된 윤치원·박행수의 사진을 들고 마나슬루 정상에 선 김미곤.
고인이 된 윤치원·박행수의 사진을 들고 마나슬루 정상에 선 김미곤.
시샤팡마 정상에서 태극기를 꺼내 보이는 김미곤 대장.
시샤팡마 정상에서 태극기를 꺼내 보이는 김미곤 대장.

7~8좌 2011년 마나슬루(8,163m), 시샤팡마(8,027m)

윤치원·박행수의 시신을 찾기 위해 나선 원정이었다. 경상·전라권 연합팀과 도로공사 대원들이 팀을 꾸렸다. 해발 7,000m대에서 박행수의 시신은 찾았으나 윤치원의 시신은 찾지 못했다. 얼어붙은 시신을 전 대원이 달라붙어 BC보다 아래인 3,800m대 마을까지 옮겨 원정은 마무리되는 듯 했다.

하지만 유족들의 “고인의 사진을 정상에 묻어 달라”는 부탁을 받고 다시 등반을 시작, 악전고투 끝에 정상에 섰다. 원래 정상을 갈 계획이 없었기에 산소도 없었다. C4에서 악천후 때문에 하루를 더 대기했다가 무산소로 셰르파 한 명과 정상에 섰다. 윤치원·박행수의 사진을 정상에 묻은 후, 엄청난 속도로 고도를 내려 당일에 BC까지 하산했다.

2011년에만 히말라야를 두 번 갔다. 전북연맹의 고우석 대원과 단출하게 시샤팡마로 떠났다. 고우석 대원은 본인이 짐이 될 수 있다 판단해 6,400m에서 등반을 포기했고, 김미곤은 스피드등반으로 정상에 도전했다. 셰르파 한 명과 C1을 출발, C2 자리에서 비박하고 C3을 구축하지 않고 15시간을 운행해 정상에 선 것. 하산도 뛰다시피 하여 C1까지 비박 없이 내려왔다. 김미곤의 과감함과 탁월한 등반능력을 보여 준 사례로 꼽힌다.

K2 정상에 선 김미곤(왼쪽)과 싼누 셰르파.
K2 정상에 선 김미곤(왼쪽)과 싼누 셰르파.

9좌 2012년 K2(8,611m) 등정

‘죽음의 산’으로 불리는 험봉을 한국도로공사 원정대와 김홍빈 대장이 함께 도전했다. 초반 날씨가 좋지 않아 고전했다. 악천후로 C1과 C2를 오르내리는 데 시간을 쏟은 것, 결국 C3와 C4를 한 번에 치고 올라가 정상에 도전하기로 했다.

성공 확률이 높지 않아 김미곤 스스로도 정상까지 가기는 어렵다고 여겼을 정도. 밤 10시가 넘어 겨우 C3에 도착해 하룻밤 자고, 다음날 오후 4시쯤 C4에 도착해 선잠을 잔 뒤 밤 11시 곧장 정상 공격에 나섰다. 밤새 끈질기게 밀어붙여 다음날 오전 10시 30분에 김홍빈 대장과 함께 등정을 이뤘다. 

가셔브룸Ⅰ봉 정상의 김미곤(왼쪽) 대장과 윤욱현 대원.
가셔브룸Ⅰ봉 정상의 김미곤(왼쪽) 대장과 윤욱현 대원.

10좌 2013년 가셔브룸Ⅰ봉(8,0 80m)

조짐이 좋지 않아 계속 긴장했던 원정이다. 탈레반의 습격으로 낭가파르바트 BC에서 12명이 죽었고, 가셔브룸에서도 사망사고가 계속 났다. 윤욱현 대원과 셰르파 1명, 쿡 1명과 함께 나선 단출한 팀이었다. 김미곤 대장은 발가락 티눈 수술한 상처가 낫지 않아 다른 등반 때보다 어려웠다.

스페인 상업원정대가 등반경험이 많은 김 대장에게 7월 22일 함께 정상을 공격할 것을 제안했으나, 그는 발가락 상처가 있어 27일로 미루자고 다시 제안했다. 결국 22일 스페인 팀 4명이 정상에 도전했으나 3명이 실종됐다.

27일 최종 캠프인 C3에 도착했으나 바람이 너무 거셌다. 이날 밤 11시 출발 예정이었으나 바람이 가라앉길 기다려 새벽 3시에 출발했다. 8,000m가 처음인 윤욱현 대원을 잘 이끌고 오후 1시 20분 정상에 섰다. 사망사고가 많았기에 하산길에 더 안전에 신경을 쓰며 저녁 때 C3에 안착했다.

11~12좌 2014년 캉첸중가(8,58 6m),  브로드피크(8,047m)

절친한 선배였던 박남수가 캉첸중가 하산 도중 추락사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예정대로 원정을 떠났다. 시신 수습도 겸하겠다는 복안이었다. 어린 후배인 조강현, 최윤정과 소규모로 팀을 꾸렸다. 캉첸중가는 등반루트가 길어 많은 장비가 필요한데, 다행히 스페인과 러시아 팀이 함께 들어왔다.

C1으로 가는 길, 셰르파들이 어렵다고 지체하는 세락 구간을 직접 선등으로 돌파했다. 지난해 일주일 걸려 뚫은 루트를 김 대장이 하루 만에 뚫은 것이다. 이에 전폭적인 지지로 외국 원정대마다 셰르파 2~4명씩을 지원 받아 루트를 열었다.

캉첸중가 정상에 선 김미곤(우측) 대장과 싼누 셰르파.
캉첸중가 정상에 선 김미곤(우측) 대장과 싼누 셰르파.
브로드피크 정상에 오른 김미곤 대장.
브로드피크 정상에 오른 김미곤 대장.

몇 번을 오르내린 끝에 C4에 도착했고, 인근의 시신이 있다는 GPS 좌표로 향했으나 시신은 없었다. 눈사태로 휩쓸려 간듯했다. 악천후로 BC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와 수색했지만 없었다. 외국 원정대들은 김 대장이 정상으로 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5월 17일 오후 6시 20분 C4를 출발해, 다음날 오전 8시 15분 정상에 올랐다. 하산길에 다시 한 번 수색했으나 끝내 시신을 찾을 수 없었다.

브로드피크는 블랙야크와 한국도로공사의 협찬으로 앞선 등반보다 한결 수월하게 나섰다. 캉첸중가 등반을 함께했던 조강현·최윤정 대원과 팀을 꾸렸다. 봄 시즌 캉첸중가를 등반하고 한 달 쉬고 왔기에, 고소적응에 대한 자신이 있어 외국 원정대보다 늦게 BC에 들어갔다. C3까지 구축하고 C4는 생략하고 곧장 정상 공격을 하기로 했다. 외국 원정대와 함께 C3를 출발했다. 전날 등정하고 하산하는 외국 대원들 덕분에 러셀이 되어 있어 등반이 수월했다. 7월 24일 오전 8시 48분 12시간 만에 정상에 올랐다. 50분 뒤에 조강현 대원이 올라왔고 C3를 거쳐 곧장 BC까지 몰아치듯 하산했다.

13좌 2016년 안나푸르나(8,091m)

두 번을 실패하고 세 번째 도전이었다. 이경주·조강현·김진현·서미석 대원과 팀을 꾸렸다. 시작부터 좋지 않았다. 캐러밴 루트가 지진으로 위험구간이 많아 통제된 것이다. 외국 팀들처럼 김미곤 대장도 헬기로 BC로 들어갔다. 눈은 너무 없었고 바람은 심해 BC에 와서도 일주일을 대기했다.

C3에서 밤11시에 외국대와 함께 출발하기로 했으나 아무도 나오지 않아 김 대장팀만 먼저 출발했다. 바람이 너무 강했고 손발가락에 감각이 없었다. 해발 7,600m를 넘어서니 더 이상 로프도 없었다. 각자 살아남기 방식으로 가야 했다. 너무 춥고 손·발가락 통증이 심해 결국 하산했다.

BC에서 며칠을 쉬고 다시 올랐다. C3를 출발해 1차 공격 때 발길을 돌렸던 지점을 지났다. 눈이 있어야 할 곳에 미끄러운 청빙이 칼날처럼 서 있었다. 옆은 아찔한 낭떠러지였다. 다른 팀들은 진행을 망설였으나 안자일렌을 하고 계속 올랐다. 4월 1일 오전 7시 50분 정상에 올랐다.

낭가파르바트 정상에 서며 14좌 완등을 이루었다.
낭가파르바트 정상에 서며 14좌 완등을 이루었다.

14좌 2018년 낭가파르바트(8,1 25m)

지난 5월 30일 한국도로공사 산악팀 2명과 경기산악연맹 등 외부 산악회 10명이 파키스탄으로 출국했다. 마지막 8,000m 봉우리지만 ‘악마의 산’이라 불릴 정도로 험봉이며, 지난해 실패를 맛본 상태였다. 원정대는 C3에서 악천후로 BC까지 후퇴해야 했지만 재정비후 곧장 C4까지 올라갔다.

김 대장은 C4 출발 14시간 만인 7월 9일 오전 8시 21분 정상에 올라 14좌 도전의 마침표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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